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힉슨 그레이시 (문단 편집) == 커리어 == 브라질의 각종 대회에서 600전이 넘는 승부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지만 셔독이나 기타 MMA 커뮤니티에서는 전적에 포함시키지 않고 레이 줄루[* [[줄루징요]]의 [[아버지]]이다. ]와의 2전만을 인정한다. 각각 1980년 4월과 1984년 1월의 기록인데 2차전에는 무려 '''2만명의 관중'''이 모였다고 한다. 1993년 힉슨의 [[동생]]인 [[호이스 그레이시]]가 [[UFC]] 1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거두자, UWF 인터내셔널의 [[안조 요지]]가 [[미국]]에 있는 도장으로 [[도장 깨기]]를 시도하러 오기도 했다. 이 대결은 도장의 문을 잠근채 행해졌는데, 힉슨이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안조를 두들겨 팼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그레이시 일족과 U-계열 [[프로레슬링]] 사이의 갈등의 시발점이 되며, 훗날 [[Pride]] 출범의 계기가 된다. 무패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1993년 미국 삼보 선수권대회에서 론 트립(Ron Tripp)[* 미국 국적의 1994년 세계 삼보 대회 우승자이다.]과의 경기에서 47초 만에 [[허벅다리걸기]]로 패배한 적이 있다. 당시 힉슨은 [[팬아메리칸 게임]] 삼보 종목[* 브라질 국가대표로 힉슨이 참여했었다.]에서 [[자랑|두번 우승했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룰을 잘못 이해했다는 이유를 댔다.[* 물론 발리투도나 MMA 경기에서는 무패 기록은 유지된다. 다만 사람들의 환상처럼 절대적인 무적 같은 선수는 아니었다.] 당시 무패로 유명했는데, 전략 실패로 공식적인 패배한 기록이 생겼기에 창피해서 둘러댄 듯 하다. 상식적으로 삼보 국가대표로 금메달까지 딴 사람이 룰을 잘못 이해할리가 없다. 게다가 유도 검은띠 유단자이기도 하다. 전략 실패로 보는게 맞을 것이다. 1994년과 1995년에는 2차례에 걸쳐 [[일본]]에서 열린 발리투도 재팬의 우승을 차지했다. 1997년 10월 11일 [[Pride]] 첫번째 흥행인 PRIDE 1에서 UWF 인터내셔널의 수장인 [[타카다 노부히코]]와 자존심을 건 대결을 벌였다. 5만명의 관중들이 운집한 [[도쿄 돔]]에서 힉슨은 경기 시작 4분만에 타카다의 팔을 비틀어 암바를 완성시키며 관광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98년 10월 11일 PRIDE 4에서 벌인 타카다와의 2차전에서도 암바로 승리하여 [[UFC]] 토너먼트 3관왕에 오른 [[호이스 그레이시]]와 함께 '그레이시 주짓수 = 세계 최강'이라는 전설을 써내려갔다. 2000년 5월 24일에는 C2K - Closseum[* 힉슨의 경기를 메인이벤트로 했던 일본의 단발성 MMA 이벤트. 이 경기의 일화로는 당시 주최사였던 Sammy(FEG 전신)가 일회성 이벤트였던 만큼 흥행을 위해 힉슨의 경기 출전을 상대가 정해지지 않은 채 미리 계약지었으며, 도쿄돔으로 장소를 미리 정한 상태였다. 또한 지상파 중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힉슨의 상대로 스타급 선수가 필요했는데, [[Pride]]에서는 계약 문제와 경쟁사를 의식했기에 선수 출전을 불허한 상태였다. 따라서 판크라스, 슈토, Rings 선수들에게 오퍼를 했고, 그 중 자국 선수이면서 판크라스의 최강자로 인지도가 높았던 후나키가 상대로 가장 적합했다. 다른 선수들은 주최 측의 뻔한 의도 때문에 상당히 좋은 조건(메인이벤터였던 만큼 거액의 대전료)을 제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했으나, 후나키는 이 제안에 기꺼이 응했다. 경기에 응한 이유가 꽤나 간단했는데, 단지 힉슨과 시합이라면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임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 대회는 일본 내에서 TV 중계로만 3천만명이 시청할 정도로 대흥행을 이루었다. ][* 힉슨의 경기 섭외를 놓치게 되자 PRIDE 측은 호이스 그레이시를 무차별급 그랑프리 토너먼트 출전을 하도록 움직였다. 일본 격투기 내에 그레이시 가문의 인지도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이 과정에서 힉슨은 지속적으로 이 점을 이용해 대전료 인상을 계속 요구해왔었다.]에서 Pancrase의 수장격인 [[후나키 마사카츠]][* 후나키는 사실상 경기 전 언급이 없었으나 부상이 누적되어 있어 1년 가까이 경기를 쉬었을 정도로 몸상태가 안 좋아 이른 나이에도 불구하고 은퇴를 고려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 후 판크라스까지 대략 15년 동안 꾸준히 경기를 뛴 여파가 컸기 때문이다. 은퇴에 대한 복선은 어느 정도 있었던게 경기 입장 당시 사무라이 복장을 입고 등장하여 경기에 임했기 때문이다. 후나키는 힉슨 그레이시한테 안와골절 부상을 만들 정도로 선전했으나 결국 경기는 패하고 말았다. 이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고, 2007년 K-1 Dynamite로 잠시 복귀했다가 다시 은퇴했다.]를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꺾었다.[* 3주전 같은 장소에서 동생 [[호이스 그레이시]]는 [[사쿠라바 카즈시]]한테 패했다. (2000년 5월 1일, 프라이드 무차별급 그랑프리 2000 8강)] 그 이후로는 나이 때문인지 더이상의 경기를 가지지 않았고, [[Pride]] 측에서 [[사쿠라바 카즈시]]와의 경기가 성사 직전까지 갔으나 후술할 이유로 취소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